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옥관빈 피살사건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>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실업가 >---- >옥관빈에 대한 중국의 평가[* 김광재,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, 한국근현대사연구 59, 2011, 47] 도산 [[안창호]]는 독립전쟁을 위해 매우 필요한 활동으로 재정 마련을 들었다. [[독립운동]]은 참가자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재정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다. 도산은 그걸 잘 알았고 자금운동과 재정 마련을 매우 중요시했다.[* 장석흥, [[안창호]] - [[한국 독립운동]]의 혁명 영수, 역사공간, 2016, 112][* 실제로 이러한 면모 때문에 [[일제강점기]]에 [[평안도]]를 기반으로 둔 신흥지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[[평안도]] 자체가 [[안창호]]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[[평안도]] 지주들은 안창호가 주장한 것처럼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돈을 버는 ‘신흥 지주’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.] 미주동포들에게는 "직접 독립운동하는 게 아니라도 재정을 감당하는 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"고 말했으며 "수입의 20분의 1을 [[독립군(한국)|독립군]]에게 보내서 지원해 달라"고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. >“내가 며칠 후에는 피 흘리는 이에게 절하겠소만은, 오늘은 돈 바치는 이에게 절하겠소”[* 박명규,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, 도산사상연구 2, 1993, 260~261] 도산은 "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재정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"고 했는데 그 원인을 [[유교]]라고 주장했다. 유교의 원인으로 재를 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. 그리고 "독립운동을 하면서 치열하게 하는데 자금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"고 지적했으며 "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자를 낮추어 보는 전통이 있다"고 주장했다. >“실상 돈이 안 나오는 이유는 우리 국민은 돈이 없어도 일이 되는 줄 아는 까닭… 그래서 독립도 글자나 말만으로 되는 줄로 아는 까닭” 그리고 모든 조직적 활동은 재정 지원에 따른 뒷받침이 중요하다고 수없이 강조하고 다녔다.[* 박명규,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, 도산사상연구 2, 1993, 261] 도산은 독립전쟁과 재정 문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다녔다. >"전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요? 곧 무기와 전술이요. 또한 무기와 전술보다도 일층 필요한 것은 무기를 사용할 군자금이외다. 군비가 있고 군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작전계획이 있나니, 군인 없는 무기를 누가 사용하며, 군자 없는 전술을 무엇으로 활용하리오." >“여러분, 독립전쟁을 하자 하자 하지만 말고, 독립전쟁에 필요한 금전을 준비하시오.” >“대한의 독립군은 먼저 돈을 많이 모으는 사업에 힘을 써야 하오"[* 박명규,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, 도산사상 2, 1993, 261] 그리고 [[독립운동가]] 중에서 재정 마련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비판했다. >“나는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소비자뿐이고 생산자가 일인도 없음을 볼 때 나의 가슴이 답답합니다."[* 박명규,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, 도산사상연구 2, 1993, 262] 도산은 "무슨 일이든지 하고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돈을 바치는 일이 곧 독립운동"이라고 하였다. >“여러분은 다 일하시오. 여기서 할 일이 없거든 서북간도에 가서 농업을 하시오. 독립운동하노라 하면서 노는 자는 독립의 적이오."[* 박명규,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, 도산사상연구 2, 1993, 262] 따로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그렇게 돈을 벌어야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8a31e74a7e699cd6b2f54e886d7f37d9.png|width=100%]]}}} || || 옥관빈의 모습[*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33080300209102014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33-08-03&officeId=00020&pageNo=2&printNo=4540&publishType=00010|193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]]] || 이런 활동에 충실한 [[안창호]]의 측근 중에는 옥관빈(玉觀彬, 1890~1933)이 있었다. 옥관빈은 [[1890년]] [[1월 18일]] [[평안도]] [[양덕군|양덕현]] 현내방(현 [[평안남도]] [[양덕군]])에서 옥윤(玉潤, ? ~ 1902)의 장남으로 [[http://db.history.go.kr/id/hd_001r_0010_0010|태어났다]]. 이후 [[평안남도]] [[평양시|평양부]] 율리면 상사리 성원시장[* [[https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2024&evntId=0034970602&evntdowngbn=Y&indpnId=0000003051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]]에는 당시 옥관빈의 주소지가 '평안남도 평양군 율리면 상사리 성원시장'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1911년 당시 평양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평양군이 아닌 평양부였으며 '상사리'라는 지명도 율리면에는 없었고 평양 부근 [[증산군]] 반석면에 있었다. 증산군 반석면 상사리는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사천리다.], [[중화군]] 동두면 하산리[* [[https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1905&evntId=0034973590&evntdowngbn=Y&indpnId=0000026012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]]에는 당시 옥관빈의 주소지가 '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하산리 무진시장'으로 기재되어 있다. 그런데 당시 중화군 동두면에는 '하산리'라는 지명이 없었고 오히려 관내에 무진시장이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'무진장리'가 있었다.] 무진시장(현 [[평양시]] [[역포구역]] 용산리)으로 이주했다. 옥관빈은 도산 안창호가 교장으로 활동한 대성학교에 다닐 때부터 도산을 열렬히 숭배하면서 추종자가 되었다. 졸업 후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[[신민회]]에 가입해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[* 김광재,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,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, 2012 , 64] 1911년 [[105인 사건]] 당시 도산의 최측근 [[https://e-gonghun.mpva.go.kr/user/ContribuReportDetail.do?goTocode=20001&pageTitle=Report&mngNo=10304|차이석]](車利錫)과 함께 [[일본제국 경찰]]에게 잔인한 [[고문]]과 끔찍한 폭행을 당했다. 차이석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을 포함해 옥관빈, 곽림대(郭林大) 같은 여러 사람들이 "고문을 받아 거의 병신이 되었다"고 할 만큼 잔인한 고문이었다.[* 차이석, 안창호 선생 피포 정형 및 그 약력, 장석흥, 2005, 237] 그는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[[징역]] 1년 6개월을 [[https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2024&evntId=0034970602&evntdowngbn=Y&indpnId=0000003051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선고받았고]] 검사 측의 공소로 2심이 개정되어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모살미수 혐의로 [[https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1905&evntId=0034973590&evntdowngbn=Y&indpnId=0000026012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원심 판결이 취소되었고]]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. 이에 상고하였으나 5월 24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[[https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1834&evntId=0034979488&evntdowngbn=Y&indpnId=0000011329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상고가 기각되었다]]. 이후 원심 판결 중 유죄가 선고된 부분이 파기되어 대구복심법원에 이송되었다가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[[https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2019&evntId=0034970456&evntdowngbn=Y&indpnId=0000002912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원심 판결인 징역 5년이 그대로 유지되어]] 결국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. 출옥 후에는 [[중화민국]] [[상하이]]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[[중국]]에 [[귀화]]해 [[중국인]]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. 또한 평소 [[장제스]]를 추종[* 상해 옥관빈, 버드나무 그늘(8월의 수필), 異域의 孤影, 동광 제24호, 1931 ([[http://db.history.go.kr/item/level.do?setId=6&itemId=ma&synonym=off&chinessChar=on&position=0&levelId=ma_014_0230_0330]])]해 일찍이 [[중국국민당]]에 입당해 중요 당직을 맡아서 활동하는 한편 삼덕양행(三德洋行)을 설립하는 등 [[자본주의]] 활동에도 충실하며 줄곧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다.[* 김광재,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,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, 2012 , 58~59쪽] 그리고 [[고려]] 관련 [[불교]] 문화재인 항주 고려사(杭州 高麗寺) 복원운동을 주도하면서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.[* 조영록, [[일제강점기]] 杭州 高麗寺의 재발견과 重建籌備會, 한국 근현대사 연구 53, 2010, 54~58쪽] 그런데 이런 모습을 일부 [[독립운동가]]들은 좋지 않게 보았다.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만 해도 돈이 부족해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옥관빈은 부자로 생활하면서 불교 문화재 복원에 큰 돈을 쏟아부으면서 사교계에 두각을 나타냈던 게 고깝게 보였다.[* 조영록, 일제 강점기 杭州 高麗寺의 재발견과 重建籌備會, 한국 근현대사 연구 53, 2010, 67~68] 그러나 옥관빈은 당시에도 [[안창호]] 측과 가깝게 지냈다. 예로 안창호의 측근이자 [[국민대표회의]] 때 안창호 측으로 같이 참여했던 [[송병조]]와도 지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송병조와 같이 있다가 [[일본제국 경찰]]이 습격해오자 송병조는 빠져나가고 자기 혼자 남아서 일본제국 경찰의 협조 요구를 거부한 적도 있다.[* [[국가보훈처]], [[프랑스]]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한국독립운동 사료 3, 2016, 해제 11, 23~24] 그리고 당시에도 옥관빈은 도산 측에게 재정 지원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. 옥관빈은 아무에게나 돈을 지원해 주지는 않았다. 예로 [[아나키스트]]들은 믿지 못해서 아나키스트들이 지원을 요구하면 완강하게 거부했다. 그러나 도산 [[안창호]]만은 의심없이 믿은 걸 물론이며 그를 숭배했다.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재정을 지원해 줬다. 옥관빈에게 자금을 받은 도산 안창호는 이 자금을 당연히 [[독립운동]] 지원금으로 사용하였다. 그리고 이 자금은 [[이봉창]] 의거가 일어날 수 있는 재정으로도 쓰였다.[* 김광재,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,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, 2012 , 63~64] 1928년 옥관빈은 안창호를 통해 [[김두봉]] 같은 독립운동가가 운영하는 인성학교에 2,000원을 기부해 주었다. 국내의 재외동포위문회가 보내온 자금은 1,000원이었는데 옥관빈이 보낸 자금은 2,000원이었다. 옥관빈의 기부한 액수는 굉장히 높았다. 그런데 이때 [[김구]]는 옥관빈을 좋지 않게 봤던 듯하다.[* 김광재,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,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, 2012, 64][* 당시 화폐 가치를 환산하면 2,000원은 1,800만원에 해당하는 큰돈이다.] 1932년 4월 [[윤봉길]] 의사의 [[훙커우 공원 의거]] 후 몸을 피하지 못한 [[안창호]]가 [[일본제국 경찰]]에게 체포되었다. 안창호가 [[상하이]]에서 활동하지 못하자 [[김구]] 세력은 안창호 측근 세력이었던 이유필, 송병조 세력들과 대립하였다. 이유필과 송병조 측은 안창호 측근이자 흥사단원이자 [[국민대표회의]]에 안창호를 따라 개조파로 참여한 인사들이었다.[* 조철행,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, 50~51] 이들은 김구 일파가 고의적으로 안창호에게 피신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. 같은 해 11월 [[아나키스트]]의 대부 중 한 명이었던 [[이회영]]이 일제에 의해 체포당한 뒤 순국했다. [[김구]]는 이를 조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회영의 조카이자 [[이석영]]의 아들인 이규서와 [[엄항섭]]의 처남이자 [[연미당]]의 동생인 연충렬이 밀고한 것을 알고 처단했다. 이를 통해 김구는 상해거류민회 회장인 이용로가 일제의 밀정임을 알아차렸다. 이규서는 [[흥사단]] 원동임시위원부의 초대 위원이었으며 이용로도 상해 흥사단의 일원이었다.[* 1931년 12월 원동임시위원부 회의록에도 이름이 남아 있다. 동명이인일 수 있으나 1926년 흥사단 뉴욕지방대회 회의록에도 이름이 올라온 것으로 보아 미국에서 상해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. 이용로는 1935년에 [[엄순봉]], [[이규창]], [[백정기]], [[정화암]] 등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암살당했다.] 이로 인해 김구의 흥사단 계에 대한 의심이 극대화된 것으로 추측되며 아나키스트와의 연합전선도 이 과정에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. 사실 당시 김구와 안창호의 정치적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. 기존 임시정부 문제로 옹호파, 개조파, 창조파로 갈등과 대립이 있었는데 김구는 [[이승만]] 정부를 강력히 옹호하였다. 그러나 안창호는 개조파로 활동하며 [[이동휘]]와 함께 [[국민대표회의]]를 주도했다. 이후 안창호 측과 대립하며 반대 활동을 하였다. 예로 1926년 5월 임시 의정원에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했는데 김구는 안창호 국무령 선임 반대운동을 하였다.[* 오영섭, 안공근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, 숭실사학회 35, 2015, 244쪽] 결국 안창호는 임시정부에 도착한 당일 선임 13일 만에 사퇴해야 했다. 이후에도 김구 측은 안창호 측과 지속적으로 갈등, 대립하였다.[* 이만열, 도산 안창호와 백범 검구, 도산사상연구 8, 2002, 184~188] 1933년 이후 백범 김구는 송병조 측과 "혁명자금" 문제로 대립을 벌였다. 결국 김구 측은 프랑스 조계에서 송병조 측을 습격하는 [[테러]]를 벌였다. 이후 옥관빈도 김구 쪽에게 테러 대상이 되었고 결국 살해당했다.[* 국가보훈처,한국독립운동 사료 :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3, 2016, 323~324] 옥관빈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김구에게 협력했던 쪽이 정화암과 아나키스트 세력이었다. 두 세력은 안공근을 통하여 김구와 연결되어 있었다.[* 이정식, 김학준,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, 민음사, 2005, 399~409쪽; 정운현, 정창현, 안중근가 사람들, 역사인, 2017, 200] 이후 옥관빈의 형 옥성빈[* 마찬가지로 [[105인 사건]]에 참여했던 인물이다.]도 같은 해 12월 암살당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